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리스트 (문단 편집) === 동료 음악가 === * [[프레데리크 쇼팽]] 쇼팽은 1810년생, 리스트는 1811년생으로 거의 동갑에 둘 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활약한지라 둘이 만나기도 전부터 비교되곤 했는데,[* 리스트가 12살에 빈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가져 유명해지자 바르샤바의 한 신문은 "우리에겐 리스트를 능가하는 천재소년 쇼팽이 있으니 빈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정작 1832년 쇼팽의 파리 데뷔연주회에서 알게 된 뒤로 둘은 평생 막역한 사이가 되었으며, 리스트-탈베르크 같은 경쟁관계가 된 적이 없다. 리스트는 쇼팽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살롱계에서 살길을 마련하도록 애썼으며 쇼팽을 평생 존경했다. 쇼팽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리스트의 연주를 높이 평가해서 자신의 에튀드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스트의 작곡실력을 높게 쳐주지 않았고 그의 작곡능력에 대해 0점이라거나 남의 말을 타고 높은 산을 정복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멘델스존이나 쇼팽처럼 창작 능력까지 조숙했던 신동들의 기대치 혹은 낭만주의 피아노 테크닉의 원류격인 쇼팽 입장에서는 독자적 음악성보다 피상적인 화려함만 보여주면서 자신의 주법을 다수 인용하는게 영 탐탁찮았겠지만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쇼팽이 생전에 접했을 리스트의 작품이 리스트 창작력의 최절정인 바이마르 시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리스트를 신뢰했던 모양으로 연주회를 꺼리는 쇼팽이었지만 리스트와 함께[* 가끔은 페르디난트 힐러까지 세 명이서]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그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리스트가 그렇게 받은 열쇠를 플레옐의 사장 부인[*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옐 피아노는 쇼팽이 가장 애용하던 브랜드이기도 했다.]과 관계를 가질 때 사용하는 [[병크]]를 저질러버린다.[* 이 플레옐 부인이 바로 베를리오즈가 로마로 유학 간 사이에 약혼을 깨고 플레옐과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메이드복을 입고 변장한 베를리오즈에게 복수를 당할 뻔한 그 마리 모크 플레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리스트와 쇼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꽤 있으나 이걸 계기로 당장 절교하진 않았다. 사실 쇼팽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 [[조르주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한 것도 다름 아닌 리스트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의 친구였던 상드는 리스트-다구 커플과 함께 스위스를 여행했는데, 그 때 리스트로부터 쇼팽의 천재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상드가 쇼팽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마리 다구가 파리에서 돌아와서 연 살롱에서 리스트의 중개로 쇼팽과 상드가 처음 만나게 된 것. 정작 둘을 소개시켜준 리스트는 상드와 다구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똥이 튀어 늘 상드에게 초대 받아서 방문했던 노앙의 집에 초대도 못 받고 쇼팽-상드 커플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이후로도 리스트는 바르샤바에서 연주회를 열 때 쇼팽의 가족들을 만나는 등 쇼팽과의 우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해봤지만 쇼팽의 지병 때문에 잘 풀리지 않은 채 쇼팽이 39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쇼팽 사후에도 리스트는 최초이자 쇼팽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쇼팽 전기[* 다만 이 전기는 리스트의 연인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기초적인 사실관계 확인이나 자료수집을 우선시하기보단 마치 산문처럼 대필했기 때문에 "쇼팽을 리스트로 만들어버렸다"는 쇼팽의 친구 율리안 폰타나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사료적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점효과 때문인지 국내 위인전이나 교과서에서도 종종 이 자서전에서 발췌된 에피소드를 무분별하게 인용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포노 출판사에서 '내 친구 쇼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출간되었으며 2019년 현재 온오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거나 연주회를 가질 때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등 쇼팽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리스트의 생애 마지막 리사이틀에도 자신이 편곡한 쇼팽의 곡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었다.] * [[펠릭스 멘델스존]] 멘델스존이 16살일 때 처음으로 14살인 리스트의 연주를 들었는데 "손가락은 많은데 머리가 모자라다"는 감상을 남겼다고 한다. 정식으로 서로 알게 된 건 1830년대 초반에 멘델스존이 파리에 머물 때로, 리스트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초견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음악에 있어 리스트는 진보적인 성향이고, 멘델스존은 보수적인 성향이라 멘델스존이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에 불평하는 일이 많았다.[* 리스트도 멘델스존의 음악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하필 멘델스존이 죽은 지 1년 뒤에, 그것도 멘델스존의 절친이었던 슈만 앞이라 슈만을 화나게 했다(...).] 그래도 친구라고, 리스트가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슈만이 쓴 기사에 의하면 리스트의 컨디션 난조로 둘째 날 공연이 취소됐을 때, 멘델스존과 힐러 주최로 리스트를 위한 음악축제를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음악성의 차이로 점차 교류가 없어졌다. * [[로베르트 슈만]] 리스트는 일찍이 슈만의 재능을 알아보고 있었다. 편지로 작곡에 대한 조언을 주고받았고 슈만은 리스트가 연주회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편지로 교류해오다가 1840년에 처음으로 실제로 만났는데 슈만은 마치 20년 지기를 만난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슈만과 결혼한 클라라는 리스트를 싫어했고[* 한 일화에선 리스트가 슈만이 작곡한 5중주를 듣고 싶다고 계속 졸라대다가 슈만이 5중주를 완성하자, 그날 밤 당장 슈만의 동네로 와서 그 곡을 듣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클라라가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연주자를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리스트 본인은 2시간이나 지각을 한 데다가 이를 듣고 나서는 정작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슈만한테 이건 당신의 곡이 아니라 음악교사 정도의 곡이라며 면박을 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슈만의 소심한 성격을 감안할 때, 정황상 뭐라 하지도 못했을 확률이 높으니 클라라가 리스트를 인간적으로도 좋아하지 못했을 공산이 높다.][* 음악 평론가 어니스트 뉴만이 인용한 데에 따르면 리스트는 '만일 당신이 슈만의 작품이 절대 그런 식으로 연주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주를 듣고 싶다면 클라라의 연주를 들으시오.'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낭만주의 논쟁에 있어 슈만은 바그너, 리스트가 속한 진보 진영의 반대인 보수적 낭만주의 진영에 속해있었기에 음악적으로 대립했다. 슈만은 <음악시보>라는 언론사를 설립하고 10년 동안 편집자로 활동하다 사임했는데, 그 다음으로 편집장을 맡은 리스트의 막강한 지지자인 프란츠 브렌델이 슈만과 그의 무리를 공격한 일로 슈만과 리스트의 사이가 더 멀어졌다. 관계에 금이 갔지만 바이마르 시절 리스트는 슈만의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장면> 3, 교향곡 4번, 피아노 협주곡, 4대의 호른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협주곡 등 그의 음악을 지휘와 피아노를 통해 적극적으로 연주했다. 리스트는 슈만이 자신에게 환상곡 op.17을 헌정했던 것에 대한 답례로 소나타 B단조를 썼는데, 악보가 전달됐을 땐 슈만이 이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라 슈만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 [[클라라 슈만]] 클라라 슈만은 예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를 존경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아버지와 순수한 음악사조를 목표하던 남편의 영향으로 점차 그의 음악과 연주를 싫어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거부감이 더욱 심해졌다고 기록에서 회고되고 있다. 하지만 1854년, 슈만의 정신불안이 심해져 입원한 후 자녀 8명을 키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클라라는 바이마르의 리스트에게 연주 요청을 했으며, 리스트는 이에 동의하여 함께 그 공연을 주관했고 얼마 후 <신음악시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실리는 비평에서 클라라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클라라는 리스트에 대한 태도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신인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를 모방하는 것을 경계하여 리스트 사후에 "그(리스트)는 뛰어난 비르투오소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위험한 교본이다. 최근에 데뷔하는 연주가들은 대부분 리스트를 모방하고 있으나 그들에게는 정신도, 재능도, 고귀함도 결여돼 있다"와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약 150년 전 조선에서도 [[김창흡]]의 시를 따라하는 후학들에게 이천보가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 바 있다. '오늘날 시를 짓는 사람들이 삼연을 본받지 않으면 남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삼연의 학식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삼연의 기이한 점만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삼연의 나쁜 병통을 얻고 만다. 오늘날 시가 쇠퇴하게 된 데 대해 삼연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와 리스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40년대 초 파리라고 알려져 있다. 리스트는 일찍부터 바그너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의 인간성이 좋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추진력과 천재성만큼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카롤린 공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에 대해 "그는 병들었고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그를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돌봐야만 합니다"라고 얘기했다고(...) 카롤린은 코지마 뿐만 아니라 리스트도 바그너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바그너는 혁명의 편에 섰다. 이 혁명은 실패했고 그는 총살과 체포를 가까스로 피해 탈출에 성공했으며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리스트는 바이마르 정부와 본인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카를 알렉산더를 설득하여 피난길에 오른 바그너에게 중립국 스위스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상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리스트가 대신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했고 이 공연으로 지휘자로서의 리스트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리스트는 바그너가 취리히에 있을 때 그를 여러번 만났는데, 특히 1853년에는 며칠동안 대화와 음악작업으로 영감을 주고받았고 리스트는 이 때 한창 바그너가 구상 중이었던 [[니벨룽의 반지]] 연작 집필을 격려했다.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삶>에 따르면 이 때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을 비롯해 여러 교향시 신작을 함께 검토했고 이 일로 창작의욕을 크게 자극 받았다고 한다. 1854년 리스트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바그너의 예술성을 옹호했다. 사방에서 돈을 빌리고 다녔던 바그너답게 리스트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위해 돈을 빌려줄 것을 여러 번 요구했고, 한번은 리스트가 자신의 형편도 좋지 않다며 출자를 거절하자 오히려 성질을 내 리스트를 어이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리스트는 바그너의 예술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니벨룽의 반지 상연을 위해 바이마르의 알렉산더 대공을 설득해서 바이마르에 새 극장을 건설하고 바그너를 궁정의 특별요원으로 임명시키려는 시도도 해봤는데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그너 또한 리스트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는데, 지금이야 낭만주의시대 최고의 소나타로 평가 받고 있지만 당시엔 한슬리크와 클라라 슈만에게 까이고 연주를 듣던 브람스는 졸기까지 했던 [[리스트 소나타]]를 리스트의 제자 칼 클린드워스의 연주로 듣고 "모든 통념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위대하고 사랑스러우며 심오하고 고상하다"며 격찬했다. [[한스 폰 뷜로]]에게 쓴 편지에서는 리스트의 작품을 알게 된 후로 화성에 관해서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고 언급했다. 다만 저명인사 중에서도 안티크리스트의 선구자 격이였던 바그너는 리스트의 종교음악에 관해서는 무관심 혹은 비판적인 태도였고 화해 후 리스트로부터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악보를 받았을 때는 코지마와 함께 작품을 디스했다. 60년대 이후 종교관의 차이에 더해 생애 문단에서도 언급 됐듯이 바그너와 코지마의 불륜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둘의 사이는 한동안 틀어졌다. 1867년에 리스트가 바그너를 방문했을 때 말싸움을 한 이후로 5년동안 그들은 절연했고, 1872년에서야 가까스로 바그너가 화해요청과 바이로이트 극장 정초식에 초대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면서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이 편지에 정중한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정초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바그너가 사망하기 직전, 1882년 11월부터 1883년 1월 사이에 리스트는 바그너 부부의 초대를 수락하여 베네치아에서 부부와 함께 지냈는데, 이 때 리스트는 마치 바그너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슬픔의 곤돌라>(첫번째 판본)를 작곡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